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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대축일 말씀

2010-04-12 23:32:00   , 11972 조회

written by 김윤채

†찬미예수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부활’ 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변화’ 입니다.


요한복음 20장 6절~10절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마리아, 두 번째가 베드로

세 번째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

오늘 우리들은 세 인물을 통하여 부활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우리는 살면서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 내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원수 같은 인간을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것이고,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새 인생으로 바꾸어 놓은 바로 그 분을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 이 여인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적그리스도들이 예수님의 애인이라고

소설을 쓸 정도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영적으로 깊이 사랑했습니다.


루가 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켜서 일곱 마귀가 나간 여인이다.

마귀 하나가 달라붙어도 인생이 괴로운데 일곱 마귀가 달라붙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 여인에게 달라붙어 있던 일곱 마귀를 예수님께서 떼어 주셨습니다.

창녀였던 마리아를 개심시키고, 정결하게 해 주신 이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근무할 때, 그 성당 앞에 술집이 꽤 많았습니다.

술집에는 술만 파는 것이 아니라 몸도 파는 창녀도 많았어요.

그 중에 한 여인이 성당에 찾아와서 면담을 청했는데

창녀들은 자기 뒤를 돌봐주는 기둥서방이 있어서

거기를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 여자의 기둥서방을 만나서 둘이 밤새 술을 마시면서 물었어요.

“이 여자, 어떻게 하면 풀어줄 수 있습니까?”

그 기둥서방 말이 자기가 이 여자에게 투자한 돈이 500만원인데

500만원만 주면 이 여자를 풀어주겠다.


500만원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버지한테 손을 내밀었지요.

“아버지, 저에게 유산으로 주실 것이 혹시 있다면, 미리 당겨서 주실 수가 없습니까?

아버지가 선뜻 500만원을 주셨어요.


그 사람에게 각서를 받고, 그 여자를 죄악의 늪에서 구해주었어요.

지금은 마음씨 착한 남자와 만나 강원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 살고 예쁘게 살고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잊을 수 없듯이

그 여인이 이 김 신부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일요일 이른 새벽에 마리아는 무덤에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고,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직성이 안 풀려서

시체에게까지 모독을 가한 것이 아닐까!


두 번째는 도둑놈이 예수님의 시체를 인질로 삼아서

돈을 흥정하려는 것이 아닐까!


막달라 마리아는 도저히 이 상황을 자기 혼자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세 번이나 배반했지만 베드로는

그때까지도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만큼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뛰었지만

젊은 요한이 무덤에 더 빨리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어린 마음에 겁이 나서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평소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들어갔습니다.


무덤은 사실 두려운 곳입니다.

컴컴한 굴속에 그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혹시 도둑놈이 그 안에 있다가

칼을 들이댈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성격대로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둘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놀랄 뿐이었고, 요한은 보고 믿었습니다.

놀란다고 하는 것은 감성을 나타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지성과 의지입니다.

신앙은 놀라는 것만이 아니라 믿는 겁니다.

순례자들이 여기 오면 이곳의 영성을 내가 목이 터지라고 설명해 주면

‘아, 그런 기적이 있었구나!’

놀라는 것은 감성이고 감정이지만, 믿는 것은 지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수의는 흩어져 있었고, 머리에 싸맸던 수건은 한쪽에 잘 개켜져 있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이것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개신교 성서 주석서를 찾아보아도 여기에 대한 주석은 없었어요.

예수님이 접어 놓으셨을까!

아니면 천사가 개어놓았을까!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무덤에 수의는 흩어져 있고,

머리에 썼던 수건은 예쁘게 잘 개켜 놓았을까!’


혹시 영감이 떠오르신 분?

손 들어 보세요.


이 세 등장인물을 통해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늘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엉망진창으로 사는 자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처음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

사심 없이, 조건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

내 삶을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기에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던 사람은

열두제자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우스개소리로 여자에게 전해야 소문이 빨리 전해진다고도 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요한!

성모님을 맡길 만큼 사랑했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요한

이것은 성모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당신 모습을 보여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예수님처럼 변할 수가 없듯이

부활은 한 마디로 변화라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부활한 신앙공동체는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말씀을 들었고,

서로 도와주었고, 음식을 같이 나누었고, 기도에 전념했다고 했습니다.


부활절이 수 천 번 돌아온다고 해도 여전히 죽어있는 성당이 있고

부활한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절이 수 천 번 돌아온다고 해도

여전히 죽어 있는 구역반이 있고, 부활한 구역반이 있습니다.


부활 때마다 ‘새롭게 부활하는 나 자신’ 이 있을 수 있고

부활이 돌아 와도 여전히 시체처럼 살아가고 있는

‘죽은 모습의 빈 무덤인 나’ 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이 두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빈 무덤이고,

또 하나는 죽은 시체가 썩는 그런 빈 무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변화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부활대축일날, 내가 전화 한 통화만 하면

기뻐해줄 사람이 있다면 지금 전화하십시오.

내 자신도 부활해야지만 다른 사람도 부활시켜 줘야 됩니다.

내 미움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고 있을 때, 문자라도 하나 넣으십시오.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먼 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제일 가까운 사람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해야 될 겁니다.


부활은 결코 우리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전구가 필요하고, 성체를 통해서 천상의 약을 먹고 힘을 얻어서

싸워 이길 수 있어야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놀랄 뿐이었지만, 요한은 믿었다고 나옵니다.

신앙은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겁니다.

신앙은 이론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자리에 모여 부활대축일을 지내는 의미를 이해하고

거룩하게 미사를 봉헌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10. 04. 04 예수부활대축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