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6 21:00:57 , 12532 조회
written by 최승만
성체조배
출처 : 2010. 08 경향잡지
글 : 신수근 비오 신부님(현재 청주교구)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것 한 가지! 신자들이 본당에 오면 꼭 먼저 들러야 할 곳, 바로 성당입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야 할 이 현상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을 만나러 왔든, 수녀님을 만나러 왔든, 사무실에 볼일이 왔든, 또 다른 일로 오든 먼저 성당에 들어가 성체조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감실 안에 계신 그리스도 앞에서 드리는 침목의 조배는 얼마나 많은 힘과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지금 잊어가고 있습니다(어느 본당 주보에서)
조배(朝拜)란 말은 그대로 풀면 자녀들이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거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예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체조배란 미사나 그 박의 다른 전례 외에 감실에 모셔진 성체께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리는 일이다.
성체께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를 그리스도와 특별한 일치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심행위라 부른다.
이에 교회는 오래전부터 성체조배를 권장해 오고 있다. 교회법에도 명시하고 있다. “성체가 보존되는 성당은 매일 적어도 몇 시간 동안 신자들이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한다. 다만 중대한 이유가 방해하면 그러하지 아니하다”(제937조). 이에 대해 한국 지역 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일찍 성당문을 열고 늦게 닫기를 권고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성체를 모셔놓은 성당을 자주 방문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하신 첫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였다. 그리고 또 여드레 뒤에도 똑같이 오시어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평화로운 시간
신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미사를 드릴 때는 마음이 참 평화스럽다.”는 말이다. 이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덮어버릴 수 있는,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무시고 계시다가 몸을 일으키시며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8,26)하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체조배는 요한 사도가 느꼈던 것과 같은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 당신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임박했을 때, 제자들과 가장 긴밀한 시간을 가지셨다. 만찬을 베푸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게 하시고는 이를 행하라고 하셨다. 그 순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 성체조배는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 바짝 기대어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다.
성체조배를 잘하려면
그러므로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은 가장 뛰어난 신심이고 우리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신심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성체를 모시고 사는 신자들은 그 일치를 성체조배를 통해서 생활 속에도 드러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주님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생각할 수 있으나 가장 확실한 길은 성경을, 그 가운데서도 신약성경을 날마다 읽어야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어느 형제는 날마다 미사 독서와 복음을 전날 밤이나 아침에 읽고 복음을 필사한다. 쓰는 것까지는 어려워도 읽는 것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둘째, 주일미사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주일은 의무를 넘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공동으로 사랑을 드리고 확인하는 날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 참조)고 하셨기에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다려온 마음으로 임해야 된다. 바로 거시에 치유가 있고 기쁨이 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우리는 몹시 기뻤노라.” 하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일상생활속에서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라고 하였다. 성령께서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로마 8,28 참조)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다.”(시편 23,1참조)는 노래처럼 한없이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정한 시간에 꼭 방문하는 습관을 갖도록 함이 좋다.
각자의 삶이 다르기에 시간을 정하는 것은 적극적인 마음으로 해야 한다. 어느 교우는 직장에 가면서 좀 일찍 집을 나서서 성당에 오는 경우도 있고, 퇴근하면서 성당에 들러 오랫동안 조배하는 분도 계시다. 낮에 오는 이도 있다.
마지막으로 침목이 필요하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며 산다. 생로병사 앞에서 여러 말을 쏟아낸다. 소리라는 살은 없어도 마음으로 말을 많이 한다. 구약의 욥기에 보면, 폭포같이 말을 쏟아내는 욥이 입을 다무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인생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데서다. 거기에서 욥이 주님께 말씀 드리는 부분이 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42,2-3).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그러기에 성체 조배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뿐 아니라. 개인의 사정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거센 풍랑 속에 가라앉을 것 같은 배 안에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어나시게 해드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어나시도록 우리가 하는 방법은 침목이다. 침목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깨워드리는 것이다. 이에 성체조배란 침목 중에 그리스도와 특별한 일치를 나누는 시간이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평화를 준다.”고 하셨다. 아무 일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의심하고 느끼는 속에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체조배보다 더 좋은 시간은 없다고 본다. 시간의 짧고 긴 것이 아니라 침목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이 되시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한 시간이다. 거기서는 이해한다는 말이 없다. 참아야 한다는 말이 없다. 품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체조배에 대하여 말할 때는 이제 고전적인 예가 되어버린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 한다.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비안네 신부님이 사목하던 본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신자가 날마다 오랫동안 성당 안에서 기도하고 나오곤 하였는데, 비안네 신부님이 궁금해서 하루는 그 신자가 성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당신은 성당에서 무슨 기도를 바치나요?”
그신자가 대답하기를
“기도를 바치다니요? 저는 그저 감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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