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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의 존재 이유

2009-11-03 22:41:10   , 10576 조회

written by 김윤채

믿는이의 존재이유(매괴 성모님 순례지에서 김신부)

한계령의 단풍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불교는 스스로가 도를 닦아서 성인이 되는 종교이지만 크리스트교는 계시종교입니다.

계시종교란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공로만으로는 죽었다 깨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 은혜가 내려야만 구원을 받는 종교가 바로 우리 그리스트교입니다.

오늘 앞 못 보는 거지의 눈을 뜨게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시는가~ 그 순서가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을 부를 때, 그 기도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소경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면서 자비를 청했지만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못 들은 척하셨어요.

왜 못 들은 척하셨을까요?

목소리가 크다고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르는 기도의 내용 가운데

세 가지의 하느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첫 번째, 절박성이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성실성이 있어야 됩니다.

세 번째는 필요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절박성, 성실성, 필요성이라고 하는

삼박자를 갖추어야만 기도의 내용이 알차게 꽉 찹니다.

거지들은 습관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소리를 지르며 돈을 달라고 합니다.

기도도 습관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의심을 하면서 하기 때문에 확신에 찬 기도를 못 합니다.

확신에 찬 기도란 무어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올 줄 알고 믿고 우산까지 준비해 가지고 온

할머니의 기도를 듣고 비를 내렸다고 하는 이야기 들으셨을 겁니다.

목소리만 크다고 하느님께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네가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나를 부르느냐?

네가 얼마나 성실한 마음으로 나를 부르느냐?

얼마나 필요성으로 나를 부르느냐?

남이 부르니까 따라 부르는 빈 껍데기처럼 알맹이가 없는 기도가 아니라

정말로 절박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두 번째, 신앙은 하느님과 1:1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을 군중들 속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를 불러오너라!’

예수님은 끝까지 1:1의 만남을 원하십니다.

영적생활의 원칙이 여기에 나오는데

우리들도 마지막에는 혼자서 예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피정 때나, 기도회 때나, 봉사할 때나

은혜 충만해서 여럿이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교시간 이후에 군중을 떠나 집으로 오면 늘 혼자가 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되며 하느님과의 1:1의 만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형제들과 같이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인기도다~ 그 뜻입니다.

영성생활의 원칙은 모임 기도 후에는 반드시 개인기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가족기도가 있고, 따로 하는 개인기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럿이서 미사를 드렸으니까 ‘오늘 기도는 끝이다’ 가 아니라

미사 끝나고 집에 가서 각자가 기도하셔야 됩니다.

미사는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이지만

주님께서는 1:1로 만나시기를 또 원하십니다.

그 사람을 따로 불러서 나에게 데리고오너라.

세 번째,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른 말로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을 정말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만일 어떤 환자가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로 의사에게 온다면 그 환자는 고쳐줄 재간이 없습니다.

만약 어떤 환자가 약 대신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고 우긴다면

그 사람을 고칠 약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기적을 경험하려면 예수님의 팔에 온전히 생명을 의탁하고 미리 앞 당겨서 감사드리는 겁니다.

길이 안 보여도 감사드리는 것이고 희망이 안 보여도 미리 당겨서 감사하는 겁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일이 성사되면 감사드릴 줄 압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도 감사드려야 됩니다.

가느다란 희망도 안 보이지만 미리 당겨서 감사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바르티매오는 감사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바르티매오는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우리는 인생살이 어려울 때마다 하느님께 이런저런 약속을 하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어려움이 해결되면 약속을 밥 먹듯이 어깁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주님 앞에서 약속했던 것 얼마나 지키고 살았습니까?

사람과의 약속은 지켜야 되지만, 하느님과의 약속은 안 지켜도 되는 겁니까?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일어섭니다.

분심, 잡념, 미움, 세상에 대한 욕심의 겉옷, 분노의 겉옷...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겉옷을 다 벗어버릴 때에야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나선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겁니까?

예수님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 가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환난의 길이고, 모욕당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다고 하는 것은 세상출세가 아닙니다.

기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살면서 어떤 부귀영화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이 약속하신 것은 오로지 두 가지

네 십자가 네가 지고 살아라!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기에 나를 따르려면

많은 고통을 겪어야 될 것인데 내 왕국은 저 하늘에 있다.

네가 이 세상에서 나를 따르기 위해서 수많은 십자가의 길, 환난의 길

모욕의 길을 당한다는 것을 내가 다 하늘의 책에 적어놓을 것이요.

세상이 끝나면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한 번도 우리들에게 부귀영화, 출세를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수많은 군중이

‘저 양반만 쫓아다니다 보면 팥고물이 떨어질 것이다.’

‘저 양반이 유대인의 왕이 되면 하다못해 동네이장자리 하나라도 주실 것이다.’

기를 쓰고 3년을 쫓아다녔는데 그토록 믿었던 그 인간이

무력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으이구..내가 저걸 쫓아다닌 3년이 아깝지!’

따라나선다는 것은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나서는 겁니다.

십자가의 길을 왜 하십니까?

십자가 한 처 한 처 마다, 우리가 살아가야 될 수많은 고비고비가 그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 넘어지셨다면 우리들도 넘어져야지요.

안 넘어지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느님도 넘어지셨는데 건방지게 어떻게 우리들이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사제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수녀들도 넘어질 때가 있고, 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져서 주저앉아가지고 신세타령 하고

한탄만 하고, 남의 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끝까지 일어서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하는 무서운 고통을 통해서 성부를 만나시는 부활에 이르렀던 겁니다.

이게 바로 세례 받을 때 “예, 주님 따르겠습니다.”

하고 맹세했던 우리 신자들의 존재이유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우리는 절대 구원을 못 받습니다.

오늘 눈 먼 바르티매오의 은혜 받는 모습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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