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9 18:11:08 , 11327 조회
written by 안젤로
마리아와 마르타! 그대들은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는 루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데, 특히 루가 복음에 그려진 두 자매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여 많은 예술작품에도 등장하고 영성가들의 묵상에도 자주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읽어가다가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택했다는 구절에 오면 무언가 마음이 석연치가 않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면, 부엌일을 하는 마르타는 덜 좋은 몫을 택했다는 건가? 그럼 누군 마리아고 누군 마르타인가? 등등.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질문을 놓고 어떻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내게 있어 이 두 자매의 이야기는 내가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돌아보는 틀을 제공한다.
내게 처음으로 마리아와 마르타를 이야기 해주셨던 분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이다. 여고 시절의 어느 여름날 저녁, 나는 성당에서 보좌 신부님이 읽어 주신 신앙시에 매료되어서 자못 상기된 어조로 어머니에게 그 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나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시더니, "너는 마리아가 되어라. 내 너를 위해 마르타가 되어 줄 테니."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말씀이 무언가 내 삶에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음은 분명하다. 그때 내 인상에 남은 것은 마리아의 택한 몫은 무언가 좋은 몫이고, 내가 그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도록 모든 희생을 다해 마르타의 몫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 엄마의 깊은 사랑이란 점이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내게 해 주셨던 어머님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였고, 우리 어머니가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질의와 담화를 정말 좋아해서 강론이나 신부님의 말씀을 골똘히 듣던 시골의 소박한 처녀였음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모님을 통해 들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던 것이고, 어머니는 내가 그 좋은 몫을 택하기를 소망하셨다. 어머님의 시대에, 그것도 시골에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God talk)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마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자로 소임을 받고 본당에 나가 일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내가 마리아의 몫이 아니라 마르타의 몫으로 불려졌음을 알았을 때, 나는 좀 당황스러웠었다. 하지만 차츰 나는 마르타의 몫이 마리아 보다 못한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미사를 차리고, 제대를 청소하고, 제의를 다리고 하는 일들은 본당 수녀인 나에게 주어진 최고로 아름다운 기도요,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 행위였다. 매일 새벽 성당 문을 열고, 미사를 차릴 때 마다 “예수님, 오늘 아침 내가 처음 부르는 이름은 당신입니다”하고 기도했었다.
마르타의 몫이 깊이 있고 품위 있는 것임을 배우다
마르타 자리의 깊이를 배우던 시절, 나는 이름 없이 봉사하는 자매들의 넉넉한 마음을 많이 만났었다. 먼 공소에서부터 읍내에 있는 성당까지 와서 하루 종일 성당의 부엌을 청소하는 자매와 한담을 나누면서, 추운 겨울에도 어김없이 맛있는 잔치국수를 만들던 성모회원의 손길을 보면서, 마르타의 몫이 깊이 있고 품위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마르타의 몫이 참 고달프다는 것도, 그리고 그들의 봉사가 참으로 당연히, 그리고 소홀히 여겨지는 때가 많다는 것도. 사실 미국의 많은 한인 성당은 주일이면 음식을 대접한다. 매번 국을 끓이고, 밥을 하고, 또 그것을 정리하고 설거지 하는 일. 생색도 나지 않으면서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꼭 마리아의 몫을 택하길 소원하셨을까?
루가 복음서를 보면, 마르타는 예수님께 저녁을 대접하느라고 바쁘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방문하셨으니, 최소한 13인분의 저녁인데, 정말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왜 좀 뭐라 하시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편애하셨나? 마르타는 허리가 휘도록 일하다 지금 불평한다고 예수님께 꾸중을 들으시는 건가?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
얼핏보면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는 "자매간의 질투" 혹은 예수의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삼각관계처럼 보인다. 과연 이 이야기는 여성의 질투와 남성의 편애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여성주의적인 성서해석은 자기의 경험을 성서해석의 기본 축으로 놓으라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첫 단계로, 구체적인 내 자매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내 삶을 돌아볼 때, 자매란 함께 속상해 하고, 울어주며, 내 상처를 싸매주고, 부축해준 사람이다. 막내로 자란 나는 언니들이 언제나 나를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 확신했으며, 지금도 언니들은 그 넉넉한 마음을 꼭 지키고 있다. 내가 바닥을 칠 때, 혹은 사회의 관념이나 통념에서 벗어나는 상황 속에서 어려워할 때,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주는 이는 사회구조의 중심에 자리 잡은 남성들이라기보다는 주변부에 서 있는 자매들이다. 그럼, 이 복음 이야기의 자매관계는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상상력"을 통해 발견한 마르타는 공동체의 푸근하고 넉넉한 지도자
여성주의 성서해석이 또 하나 강조하는 바는 "상상력"이다. 텍스트가 이야기하지 않는 많은 빈 공간을 체화된 상상력으로 채우라는 것(fill the gap)이다. 우리 엄마가 내게 소망했듯이, 마리아같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어떤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뜻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남자 제자들의 전용자리이며, 마리아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사회의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차지하고 앉아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 언니는 어떻게 할까? 우선은 안타까워 할 것 같다. "그냥 이리 와. 여기도 잘 들려" 하면서. 그래도 내가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내편을 들어줄까를 전전긍긍하며 궁리하겠지. 이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상상해 보면, 남자 제자들이 마리아의 태도에 화를 내며, 집 주인 격인 마르타에게 지금 마리아가 뭐하는 거냐고 압력을 주는 중일 수도 있겠다.
나는 여기서 마르타의 지혜를 상상한다. 마르타는 예수, 그분의 맘을 충분히 알았다. 그분이 누구신지도 분명히 알았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마르타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가 하는 고백과 동등하다. 이 마르타는 지금, 시침을 뚝 떼고, "예수님, 마리아 좀 보세요, 저를 도와주지 않아요, 저는 이렇게 일이 많은 데요" 한다. 그이는 예수의 대답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설사 관습상 그것이 남성에게만 허용된 것이라 하더라도. 아마 이 대답은 마르타에게 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발치에 앉은 마리아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럼 이 지혜로운 마르타는 누구인가? 요즘 환대(hospitality)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마르타는 그녀의 가정 공동체(household community)에서 환대를 맡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 공동체의 푸근하고 넉넉한 지도자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미사를 봉헌 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오늘의 미사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아마 공동체의 일원들은 한 가정에 모여서 직접 만찬을 준비 하고,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르타의 몫은 아름답다. 식사를 준비하느라 닭을 잡고, 국을 끓이고 해서만이 아니다. 그 봉사는 바로 교회의 리더쉽을 의미했고, 교회의 지도자의 자리란 그런 봉사의 자리였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는 마르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사랑한다.
오리게네스는 마르타가 마리아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고, 여성 성서학자 휘오렌쟈는 지쳐서 지도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주저앉은 마리아를 마르타가 다시 교회의 봉사로 초대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였다. 나는 공동체의 자리에서 국을 끓이고, 국수를 말고 있을 많은 자매들이 공동체의 주인이고 리더임을, 그리고 그들의 작은 수고와 땀들이 성찬례를 이루는 핵심임을 늘 기억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수고하는 고운 손길은 발치에 앉아 예수를 바라보던, 예수, 그 분과의 친교에서 나오는 것임을 늘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나는 고백한다. 마리아와 마르타, 그대들의 몫은 모두 다 아름답다고. 그리고 우리 안의 마리아와 마르타가 함께 한껏 살아 질 때, 우리 삶의 몫은 아름답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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