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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어디까지 고백할까?

2011-12-11 20:44:02   , 13849 조회

written by 최승만

[도서] 세상 속 신앙 읽기

고해성사, 어디까지 고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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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라면 12월 성탄과 연말을 맞이할 때마다 판공성사표를 들고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판공성사는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나, 본당 신부에게 보기 힘들었던 ‘고해성사’를 손님 신부에게 보는 특혜도 주어지는 연말정산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해성사’는 신앙과 무관하게 일반인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는 가톨릭의 유산이지만,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여전히 부담스럽게 여긴다. 성사를 보더라도 부활과 성탄 전의 판공성사는 행여 냉담자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치르는 ‘의무방어전’인 경우도 많다. 한 달에 한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되어있는 신학생들이나 수도자들 그리고 열심히 신자들에게 고성성사는 ‘은총 만땅’의 성사이긴 하지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는 여전히 짐스럽기만 하다.

고해성사를 자주 보는 이들도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어디까지가 죄에 속하는지 고민하게 되고, 짐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죄에 한하여 고해성사를 보도록 한다. 일상의 습관적인 죄와 부덕함에서 나오는 소죄들은 개별 참회나 미사 전 통회의 기도를 통해서도 요서가 된다. 하지만 교회는 보다 깊은 영적 성숙을 위해서 정기적인 고해 성사를 통해 영혼의 치유를 체험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이 고해성사 대상인 대죄이고, 무엇이 굳이 성사 때 고백하지 않아도 되는 소죄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특히 판공성사 때와 같이 짧은 기간에 많은 이가 성사를 봐야 하는 시기에는 깊은 내적 통회 없이 고백해도 괜찮을 만한 죄를 먼저 고백하고, 정작 고백해야 할 대상은‘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성윤리와 관계되어 고백하기 껄끄러운 죄와 행여 신부님이 들으면 충격 받을 내용은 배려 차원에서 고백하지 않기도 한다.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내 죄를 알고 계시고. 용서해 주실 것이란 믿음 때문일까? 자기 죄는 고백하지 않고, 남의 죄만 열심히 고백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은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면서, 남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판공성사 때 술 한 잔 마시고 들어와 넋두리를 하거나, 다짜고짜 죄만 고백하고 사죄경도 듣지 않고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죄’란 흔히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했거나 금육재와 같은 계명을 위반한 것보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근본적으로 죄는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삶을 살았거나 저지른 행위가 있다고 모든 죄에 속한다. 십계명과 윤리적 계명은 물른, 하느님 없이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 그분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 것도 죄에 속한다. 더 나아가 같은 피조물로서 이웃과 관계를 단절하는 행위 또한 사랑을 거스르는 죄다. 이웃을 미워하고 속이고 소외된 자를 돌보지 않는 것도 사랑을 거스르는 죄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죄의 내용 자체가 아니다. 고백할 내용이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를 ‘얼마만큼’ 단절시켰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물론 성찰의 기준은 내가아니라 하느님이어야한다.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참된 양심성찰과 통회가 이루어지지 때문이다. 고해성사는 단순히 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내가 하느님과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회심 없는 고해성사는 결코 삶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앙에서 죄의 고백은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연인이나 부부, 친한 교우 상대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상대의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때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오롯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체험 없이는 죄에 대한 참된 묵상이 불가능 한다고 했다. 죄는 본래 이기적 자기애와 자기 합리화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행여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은 수치의 대상이지, 결코 용서의 대상은 못 된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자리이다. 하느님에게 받은 엄청난 사랑 때문에 내 죄와 부족함을 고백할 용기가 생기는 자리이다. 많은 이가 고해성사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운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기쁨 때문이다. 그 눈물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고해성사가 주는 평화와 은총을 결코 누리지 못한다.

고해소를 찾는 일이 두렵고 떨리겠지만, 고해하기 위해 시간을 내고, 장시간 성당에서 기다리는 마음조차도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기에 고해소를 찾아오는 신자들의 발길은 아름답다. 그러서 눈물로 솔직한 고백을 하는 신자들을 만나면 먼저 하느님께 감사가 터져 나온다. 냉담 기간이 긴 신자를 고해소에서 만나면 ‘대어’를 낚은 느낌이다. 사제라면 누구나 고백을 듣는 고해서가 사제 스스로의 ‘양심 정화소’가 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판공성사가 의무방어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의 체험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제인 나도 그런 체험이 그리워진다.

출처 - 세상 속 신앙 읽기(지은이:송용민 신부님) 내용중